역할놀이는 인생경험의 텃밭

지금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이 어렸을 때는 친구들끼리 소꿉놀이를 한 기억이 있을 듯 하다. 자기 집에서 노는 아이가 주로 엄마 역할을 하고, 아빠, 아이들 그리고 이모, 고모 역할까지 등장했다. 그 집에 동생이 있으면 아기 역할을 시키곤 하였다. 소꿉놀이에 이어서 병원놀이, 학교놀이가 진행되었다. 애꿎은 동생을 데려다가 주사를 놓는다고 엉덩이를 내리기도 하고, 숙제를 안했다고 벌을 주기도 하면서 대리만족을 경험하였다. 어린이집, 유치원 등 유아교육기관에서 자유놀이 시간에 역할놀이를 하지만 이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줄었고, 아이들은 집에서 역할놀이 대신에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놀이치료실에서는 다양한 역할놀이들이 생생하게 이루어진다. 크고 작은 인형들, 우유병, 포대기, 침대, 냉장고, 식품모형들, 카메라, 청진기, 핸드폰, 자동차, 비행기 등등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놀잇감들이 즐비하다. 놀이치료자는 아이의 다양한 감정과 행동들을 수용해주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배역을 맞추어준다. 선생님처럼 훈계하지도 않고,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치료자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이 다양한 모습들을 비추어본다.

희수는 얼마 전 동생이 태어났다. 엄마와 분리불안이 심했고, 작은 일에도 놀라거나 걱정이 많은 아이인데 요즈음 미운 짓들을 골라서 더 많이 하고 있다. 희수는 인형을 가지고 논다. 무서운 엄마역할이다. 아기 인형이 우유를 잘 안먹는다고 혼내키기도 하고, 말을 안듣는다고 ‘빨리빨리’를 재촉하며 엉덩이를 때려주기도 한다. 정민이는 요즈음 매일 파워레인저 놀이를 한다. 천하무적 파워레인저는 악당들을 모두 물리친다. 실제로 정민이는 유치원에서 힘이 약하고 말도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자신감이 없다.

아이들에게 역할놀이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 경험을 연습하는 텃밭이 된다. 아이들은 어릴 때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놀이를 재미있어한다. 더 크면 아이가 부모에게 역할놀이 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엄마를 친구로 생각하고 배역을 준다. 아기 역할, 환자 역할, 그리고 공룡 역할을 시킬 수도 있다. 아이가 아이 역할을 하면서 엄마에게 엄마역할을 시키지는 않는다. 아이와 함께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공유해보자. 이 때 만큼은 눈높이를 아이에게 맞추고, 친구같은 부모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 내일신문 제 89호(09년 6월 9일 ~6월 15일)에 게재된 내용입니다.